화학·제철 건설현장 외국인력 족쇄 푼다 정부, 17년 만에 플랜트 고용 규제 완화 최대 2만명 유입 … 인력난 해소·공사비 절감 효과
샤힌 프로젝트 등 전국 12곳 52조 규모 사업 '속도'
이르면 상반기 석유화학, 제철, 발전소 등 플랜트 건설 현장에서 단순 업무를 하는 외국인을 채용할 수 있게 된다. 2007년 정부가 이들 시설을 ‘국가 보안시설’로 묶어 외국인 취업을 막아 왔는데 17년 만에 이를 풀어주기로 해서다. 업계에서는 최대 2만 명에 달하는 외국 인력이 유입돼 전국 12개 사업장에 배치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14일 플랜트업계에 따르면 국무조정실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국토교통부 등은 최근 회의를 열고 비전문 취업 비자(E-9) 및 중국 동포 방문취업 비자(H-2)를 소유한 외국인을 석유화학, 제철, 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할 수 있도록 허용하기로 했다. 정부는 각 플랜트 현장을 찾아 실태를 파악한 뒤 국무조정실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외국인력정책위원회를 열어 사업장별로 국가 보안시설을 해제할 계획이다.
정부 관계자는 “일손 부족으로 모두 52조원이 투입되는 12개 대형 플랜트 건설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길 것을 우려했다”며 “외국 인력은 자재 관리, 청소 등 단순 업무를 맡는 만큼 보안 정보가 뚫릴 가능성은 없다”고 말했다.
정부는 다만 각 기업에 한국 인력을 우선 뽑도록 한 뒤 부족한 인원만큼만 외국 인력으로 채우도록 할 계획이다. 예컨대 1만 명의 건설인력이 필요한 사업장이 한국인으로 6000명밖에 못 채웠다면 나머지 4000명을 외국인으로 뽑을 수 있게 하겠다는 얘기다.
규제가 완화되면 인력난으로 골머리를 앓아 온 플랜트 기업은 한숨을 돌릴 수 있다. 작년만 해도 플랜트업계에서 필요한 인력은 14만6788명이었는데 13만4100명만 공급돼 1만2688명이 부족했다. 업계는 올 하반기부터 매일 1만7000명의 건설인력이 필요한 에쓰오일의 ‘샤힌 프로젝트’가 첫 수혜를 볼 것으로 예상했다. 에쓰오일은 9조2580억원을 들여 2026년까지 울산에 국내 최대 석유화학 단지를 건설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 산하 플랜트건설노조는 이날 기자회견을 열어 “외국 인력 도입은 건설 현장의 청년 일자리만 빼앗아 갈 것”이라며 “상경 투쟁 등 집단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노조 '밥그릇 챙기기'에 플랜트 현장 만성 인력난 … "숨통 트일 것"
에쓰오일이 울산에 9조2580억원을 투입해 국내 최대 석유화학 설비를 짓는 ‘샤힌 프로젝트’ 기공식을 연 건 작년 3월이었다. 하지만 시공사인 현대건설, 현대엔지니어링, 롯데건설, DL이앤씨 등은 착공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현장인력 운용 계획을 제대로 짜지 못하고 있다. 하루 최대 1만7000명이 필요한데,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내도 1만 명 이상 구할 수 없어서다.
시공사 관계자는 “하루 최대 6만 명을 투입하는 삼성전자 평택사업장이 건설 인력의 ‘블랙홀’이 된 탓에 울산 같은 지방에선 사람 구하는 게 하늘의 별 따기가 됐다”며 “일반 건설현장이나 조선업계와 달리 플랜트업계만 외국인력 채용을 막는 건 말이 안 된다”고 토로했다. 정부가 석유화학, 철강, 발전소 등 플랜트업계에 외국 인력 채용을 허용키로 한 배경이다.
○52조원 플랜트 건설 현장 ‘숨통’
14일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현재 공사에 들어갔거나 연내 착공할 예정인 플랜트 건설 현장은 모두 12개다. 이들 현장에 들어가는 투자금은 52조원에 달한다. 울산에는 샤힌 프로젝트와 함께 SK지오센트릭의 1조5000억원짜리 발전소 및 플라스틱 재활용 시설 공사가 진행되고 있다. 경북 포항과 충청 지역은 ‘배터리 단지’ 공사로 분주하고, 전남과 수도권에선 15조8000억원 규모의 해상풍력발전단지 공사가 한창이다.
플랜트업계는 이들 사업장에 용접과 배관 업무 등을 보조해줄 단순 업무에 한해 외국인 채용을 허용해 달라고 호소한다. 3~5명의 용접 전문가로 구성하는 기능인력팀마다 1~2명의 외국인만 붙여줘도 숨통이 트인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가스 용량 체크나 청소, 간식 배달, 화재 관리 등 허드렛일만 해줘도 큰 도움이 된다”며 “어차피 한국 사람들이 선호하지 않는 분야인 만큼 일자리 간섭도 없다”고 했다.
외국인을 채용하면 인건비도 상당폭 줄일 수 있다. 플랜트 현장 인력은 대개 숙련공과 일반공, 안전관리자 등으로 분류된다. 이들의 일당은 숙련도에 따라 하루 8시간 근무 기준 15만~25만원 정도다. 일반 건설업계에서 단순 업무를 하는 외국인의 일당은 10만원 안팎이다. 업계 관계자는 “사업장에 따라 한국인이 해온 단순 업무를 외국인에게 맡기면 30% 정도 인건비를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부의 이번 조치는 조선업과 형평성을 맞춘 측면도 있다. 정부는 지난해 조선업에 한해 특별 비숙련 취업(E-9) 비자 쿼터제를 도입해 5000명을 추가 배정했다. 덕분에 모두 1만4359명의 외국인이 국내 조선소에 투입됐다.
○국가 보안시설 기준 달라질까
정부는 이참에 국가 보안시설 제정 기준을 새로 손보기로 했다. 정부 관계자는 “한국 석유화학, 제철, 발전 기업은 국내에선 외국인을 못 쓰지만 해외 사업장에선 아무런 제약 없이 현지인을 고용하고 있다”며 “똑같은 시설이란 점에서 국내 사업장만 국가 보안시설로 묶는 건 불합리한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따지고 보면 2007년 석유화학과 제철, 발전 업종을 국가 보안시설로 분류한 것도 국가안보나 기술 유출이 이유가 아니었다고 플랜트업계는 설명한다. 2004년 외국인 고용을 위한 산업연수생 제도를 처음 도입할 당시 석유화학은 ‘외국인 채용 가능’ 분야였다. 하지만 2007년 산업연수생 제도 대신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노조의 입김이 반영돼 ‘외국인 채용 불가’ 업종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업계 관계자는 “당시 노조가 펼친 ‘내국인 일자리 보호와 국가안보를 위해 석유화학 분야는 외국인 고용을 막아야 한다’는 주장을 정부가 받아들였다”며 “발전과 제철도 비슷한 과정을 거쳐 국가 보안 시설이 됐다”고 말했다.
오치돈 한국건설인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단순 노무직을 맡은 외국 인력이 기술을 빼간다는 논리는 맞지 않는다”며 “한국 기업의 해외 사업장에 수많은 외국인이 일하지만 기술이 유출된 사례는 없다”고 했다.